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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학개른 배포본 전문공개









세상일은 아무리 지대한 권력자라 한들 그리 녹록하지는 않다.

마침내 대량을 무너뜨려 중원을 평정한 북연의 황제도 세상일이란 그리 쉬이 제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정복 전쟁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세상이 저의 뜻을 들어주었으나 그 외의 일에는 마치 그 모든 일들을 정복전쟁에서 모두 허비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돌 정도로 그의 세상일은 그리 수월치는 못했다. 첫째로는 통일 이후 그리 국내의 정세가 안정되지 못했다는 점이요, 둘째는 그가 그토록 연모하던 이를 기어이 황후의 자리에 앉혔음에도, 황후는 그리 긴 명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연성...”

제 이름이 불린 사내는 이미 쥐고 있던 손을 조금 더 힘을 주어 쥐었다. 저를 부르는 그 음성은 곧 끊어질 듯이 가냘프게 제 귓가를 울릴 뿐이었다. 대량을 수호하던 그 우렁찬 목소리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제는 그저 병에 굴복하여 침상에서 고요히, 자세히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을 것만이 남았을 뿐이다. 울컥. 눈이 뜨거워졌다. 이 모든 것이 참혹한 전쟁을 저지른 저의 죗값인가 하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그렇다면 저를 데리고 가셔야지 왜 이 사람을 데려가십니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하늘에 한껏 원망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 앞의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것 아십니까? 이렇게 마지막까지 연성의 품에 있을 수 있다는 것에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를.”

한 없이 작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갈라지고 더욱 더 작아졌다. 결국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수많은 일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대부분은 경염에 관한 기억들이었다. 수많은 갈등과 다툼이 있었다. 때로 정말 목숨을 버릴 각오로 서로에게 굴복하지 않으려 했다. 그 무수히 많은 일들을 넘어 이제 마음이 비로소 통하였건만...

“제가 가장 후회하는 일은, 연성과 그리 수없이 많은 세월을 다툰 것이지요. 왜 이 마음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그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도 못했을까요. 그것이 가장 후회가 됩니다. 이리 짧을 줄 알았더라면...”

조금 길게 말을 한 탓일까, 경염은 끝으로 갈수록 가뿐 숨을 내뱉더니 결국 말을 마저 하지 못하고 연신 기침을 해대었다. 숨이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 연성은 그 작은 기침에도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다.

“다 알았으니, 이제 말을 삼가시오. 모두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바이오......”

떨림을 감추지 못한 채, 연성은 흐느끼듯 말했다. 그 다툼 속에서 저의 보잘것없는 자존심에 황후에게 내렸던 호된 벌들이 없었으면 이런 일도 없지 않을까, 혹은 더 뒤로 미뤄져 오래도록 제 곁에 머물러주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속죄를 하듯, 수없이 되뇌고 또 되뇌었다.

“이제 작별인사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힘겹게 들이 내쉬는 숨 사이로, 경염은 웃으며 말했다. 얼굴에 힘도, 생기도 없었지만, 진심으로 짓는 미소라는 것쯤은 쉬이 알 수 있었기에, 연성은 그 미소가 더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제 이 얼굴이, 이 표정이, 제 평생 눈 앞에 어른거릴 얼굴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어디에도 발을 붙이지 못했던 저를, 그토록 넘치게끔, 은애해주셔서,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숨을 골라가며, 경염은 연성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연성은 점점 힘이 풀려가는 손을, 마치 이 손을 꼭 붙잡고 있으면 경염이 떠나지 않을 것처럼 더욱 힘주어 쥐었다. 방울 방울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졌다. 속이 답답하고 눈가가 아플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다음에는... 다음에는 후회 없이 그대에게 내 일생을 줄 것이오. 내 모든 것을 줄 것이오. 그러니...”

목이 메이고, 전하고 싶은 말이 그에 막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경염은 천천히 다른 팔을 올려 마지막으로 연성의 뺨을 쓸었다.

“그럼...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연성의 뺨에 닿았던 손이 아래로 떨어지며, 눈꺼풀 또한 이별을 말하듯, 굳게 닫혔다.







홍력은 제 아래에 천하를 두고서도 그 깊은 마음 속에서 공허를 느낄 수 있었다. 수많은 여인들을 안아도, 몇 번이나 성대한 연회를 열어도, 그 공허의 단 한 부분조차 채울 수가 없었다. 허전하고 또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했다. 과연 도대체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홍력은 제가 공허를 느꼈던 열 다섯부터 수없이 생각했다. 무엇을 하면 이를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이를 채울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오랜 고민에도 불구하고, 홍력의 그 빈 틈은 점점 더 커져만 갈 뿐, 채워지지도 줄어들지도 않았다.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갈구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공간이 커져감과 함께 이에 대한 감정이 그리움과 비슷하다는 점과 그것이 사람을 향하고 있다는 점은 느낄 수 있었지만, 여전히 어떠한 이유로 이렇게 간절하게 그리워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공백을 자각한 지는 이미 벌써 십여 년이 지나고 있었고, 무의식적으로 홍력은 제 속의 공허는 제가 죽을 때까지 절대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고 있었다.

“밖으로 잠행을 나갈 터이니 준비하거라.”

금일의 마지막, 취침만을 남겨둔 상태에서 홍력은 충동적으로 옆의 내관에게 명했다. 공허를 자각한 이후부터 몇 번이나 이렇게 궁 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오기를 반복했던 만큼 내관의 움직임은 신속하고 또 정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복을 하고서 궁을 나설 채비를 모두 끝내자, 겨우 두 셋의 내관과 그와 비슷한 숫자의 호위들만이 황제의 뒤를 따랐다. 공허를 자각한 이후부터 시작된 잠행이었다. 아무리 궁이 넓다 한들, 제 공허를 채워줄 수 없으니 그저 겹겹이 둘러싼 담이 답답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저 밖에, 무언가 저를 부르는 듯한 이끌림이 홍력을 부르는 듯 하였다. 때때로 참을 수 없이 그리움에 사무치면 홍력은 궁 밖으로 몰래 빠져나가 이리저리 돌아다니곤 했다. 그렇게 정해진 곳 없는 발걸음이, 본능과도 같이 저가 원하고, 또 그리도 그리워하는 것을 향해 저를 이끌어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매번 제가 나오던 날들과는 달리, 오늘은 민가에서 축제가 있는 날이었다. 황궁의 것과는 달랐으니, 이것은 홍력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득시글한 인파에 한번도 어깨를 맞대며 앞으로 나아간 적 없던 홍력은 과연 저 무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나오자 마자 발길을 돌려 환궁할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사람이 많을수록 제 내관과 호위들과 떨어지기 쉬웠고, 또 혹여 제 목숨을 노리는 자가 있어 저를 미행하고 있다면 최적의 장소와, 때가 될 것이 분명하였다. 이성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위험하니 발길을 돌려 궁으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렬한 직감이 인파 속을 향하고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홍력은 그 사이를 갈등하는 동안 저도 모르게, 축제의 인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초입에 다다르는 순간, 갑자기 무언가 다른 세상에라도 온 것처럼, 공기가 달라졌다. 저 안에 있다. 저 안에서 그토록 원하던 것을 가질 수 있다. 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온 몸이 저릿하게 떨려왔고, 기대감이 온 정신을 감싸 눈 앞을 가렸다. 앞 뒤를 잴, 잠깐의 여유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눈으로 피가 쏠리는 듯이 눈가가 화끈거렸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도 낭비였다. 시야가 붉게 변했다. 뒤덮은 적색은 곧 한 자리로 모여들었다.

‘실...?”

제 눈앞을 뒤덮었던 붉음이 모이더니 이내 실의 형태가 된 것에 홍력은 의아했다. 그리고 그 실이 향하는 한 쪽 끝은 들어올린 손가락에 묶여있었다.

저 실을 따라가면 네가 원하던 걸 찾을 수 있을 거야. 얼른 걸음을 옮겨. 이번이 지나면 언제 돌아올 지 몰라.

공기가, 제 손에 묶인 실이 앞으로 펼쳐진 가느다란 궤적을 따라가라 제 귀에 속삭였다. 날아갈 듯 가벼운 목소리로, 책임을 묻자 하면 이미 날아가버렸을 목소리로. 하나 둘 셋.

마치 신호라도 되는 듯, 그 작은 목소리가 셋을 외치자마자 홍력은 걸음을 뛰듯이 재촉했다. 이번이 지나면 언제 돌아올 지 몰라. 그 말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눈으로 모였던 뜨거움은 이내, 그 손을 뻗어 홍력의 뇌 모두를 점령했다. 뜨겁고, 아프고, 그립고 또 슬펐다. 수십 개의 감정이었고, 수백 개의 감정이었고, 또 수천 개의 감정이었다. 점점 그 가짓수는 늘어나만 갈 뿐이었다. 마치 오래 전,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것을, 지금 찾으러 가는 듯 했다. 아니 홍력은 확신 할 수 있었다. 지금 제가 달려가는 것은 까마득한 옛날 제가 떼어낸, 떼어내진 저의 일부이고, 또 전부이라는 것을.

수명의 장정들이 모여있어도, 까딱하면 발에 채일 듯한 아이들이 저의 앞에 있어도, 그 어느 때보다 그것들을 어떻게 지나가야 할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지나온 길의 거리만큼의 실이 손가락을 감아왔고, 이내 손 전체를 감아오기 시작했다. 곧 끝이 난다. 그 끝이 어디를 향하는지 모르고 길이도 얼마나 긴지 알지 못했지만, 끝이 곧 온다는 것은 직감할 수 있었다. 주체할 수 없이 뛰는 심장과, 화끈거려 이제 눈물이 뺨을 타고 내리는 눈,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머리가 그 증거였다. 마지막으로 제 눈 앞을 가리고 있던 사내를 지나자, 눈 앞은 빛으로 점멸했다.





한미한 가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세도가의 자제도 아니었기에 일림은 그다지 입신양명의 꿈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언젠가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아,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고, 그렇게 늙어서 죽지 않을까. 그의 미래에 대한 계획은 고작 이 정도에 불과했다. 맹세코 황제의 신임을 얻고 높은 관직에 올라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그런 꿈은 꿔 본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그의 앞에 닥친 이러한 상황은 그저 당황스럽고, 또 기회라는 생각보다는 혹여 잘못을 하여 목이 달아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부터 들 뿐이었다.

“고개를 들라.”

전혀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푹 숙인 일림에게 황명이 떨어졌다. 일림은 조심스레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방금 귓가를 울린 황제의 목소리가 무게가 실려 제 목을 짓누르는 듯 했다. 하나 둘, 하나 둘.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는 중압감에 일림은 새파랗게 질려 대부분의 신경을 호흡을 가다듬는 데에 쏟았다. 이러면 조금 편안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오히려 긴장감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었다.

“그대는 과인을 본 적이 있는가?”

또다시, 황제의 말이 일림에게로 떨어졌다. 모으고 있는 두 손이 형편없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마 천 너머로도 그 떨림을 볼 수 있으리라. 이렇게 황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처음으로 발걸음한 일림으로서는 그 물음의 의도를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완전히 올라간 고개에 일림은 질끈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눈앞에 보이는 얼굴은...

“......!”

방금 전 까지 생각했던, 황제의 옥면을 제까짓게 어찌 알겠냐 했던 생각은 이미 저 멀리로 날아갔다. 마치 단단한 쇠몽둥이로 뒷목을 후려 맞은듯한 충격이 일림을 감쌌다. 분명 축제에서 만난 그 이였다.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 그리 말하던 것이 이런 것이었나. 그 이후로 제가 가르쳐준 저의 집 근처에 전혀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던 사내를 원망했었는데, 하마터면 경을 칠만한 일을 저지를 뻔 한 것이었다.

“내 장담하지 않았느냐.”

조금의 웃음을 띤 목소리가 편전을 울렸다. 오랜만에 듣는 이 목소리를 방금 전 황제의 목소리로 알 적에는, 어째서 알아채지 못했을까.

“그래서 그때의 제안은 생각해보았느냐?”

“소인, 황제의 명을 받잡나이다.”


2017.01.07

카이학개른 발행

Not For Sale

@saiker0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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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력일림] 送別  (0) 2016.11.30

WRITTEN BY
serel
@saiker0_0

,

[홍력일림] 送別

王凱 2016. 11. 30. 06:30


왕카이 sf른 합작에 참가한 글입니다







아무리 발전한 기술로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일림은 태어날 때부터, 만약 십 년만 늦게 태어났더라도 이 세상에서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날 운명이었다.  운이 좋게도 조금 더 늦게 태어난 일림은 목숨을 부지하고서 이 세상에 발 내딛을 수 있었고, 또 제게 원래 주어졌을 것보다 더욱 더 긴 세월을 살아 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언제나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듯, 일림의 몸은 운명을 거스른 댓가라도 치른 듯 무척이나 허약했다. 육체노동은 물론, 원하지 않는다면 이제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펼쳐졌지만, 그마저도 일림에겐 너무나도 힘겨운 세상이었다.

이제껏 살아온 나날들 중 아마 과장하지 않아도 일림의 삶은 반 이상이 병원에 있는 거이었다. 그중 절반은 또 중환자실에서 보냈다. 매번 쓰러지고 이송되고, 또 실려오고 이송되고의 반복인 삶이었다.
하아. 일림은 한 숨을 쉬었다. 이런 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원망을 하지는 않지만, 창 밖을 바라보면 그래도 씁쓸한 마음까지 들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 아이들도 아파서 병원에 있는 것이겠지만, 적어도 일림의 관점에서 뛰어다니고 공을 차는 아이들은 너무나도 건강하게 느껴졌다.

이제 새로이 간을 이식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일림은 천천히 제 원래 장기와, 인공장기의 수를 세었다. 한 때는 인공장기라는 것에 조금 거부감을 느꼈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제 장기의 거의 대부분이 원래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마치 태엽이 다 풀려버린 인형이 그 자리에 멈춰 서 가듯, 일림의 몸은 하나 하나 점점 말을 안듣고 기능을 잃기 시작했다. 얼마나 남았을까. 대충 기억나는 제 장기는, 이번에 간을 교체하게 되면, 심장밖에 남지 않았다.
수술일이 멀지 않은 날, 일림은 이동의자를 타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제 몸을 의자위로 옮겨주었던 간호사는 절대 안된다며 말을 하였지만, 일림은 괜찮다며 떼를 썼다. 평소에는 고분고분하다가도 한번 마음을 먹으면 그것을 고집하는 성정이 결국 빛을 발했다. 간호사는 한숨을 쉬며 단 한 시간 뿐이라고 말했다. 한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의자가 병실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일림은 그 말을 들으면서 제가 무슨 신데렐라 같다고 느껴졌다. 그녀에게 마법이 벗겨졌듯, 자신의 건강해 보이는 이 연기조차 하나 둘 벗겨져 나갈 것이었다.

아야.  일림은 그저 의자가 움직이는 대로, 앞만 바라 보다가 제 뒤에서 나는 소리에 가던 길을 멈추고서 뒤를 돌아봤다. 그 뒤에는 자그마한 아이가 의자에 부딪힌 듯 주저앉아 있었다. 일림은 화들짝 놀라 일어서려 했으나, 다리가 제대로 말을 들을리가 없었다. 철푸덕. 일림의 뺨이 결국 병원의 차가운 바닥과 맞닿았다. 팔을 움직여 상체만이라도 일으켜 세워보려 하였지만, 팔은 상체를 일으킬 만큼의 힘을 낼 근육이 전혀 없었다. 일림은 매번 겪었던 일이었지만, 비참하기 그지 없다 생각했다.

“내가 넘어졌다 해서 너도 넘어지면 어떡해!”

어린 아이의 목소리였다. 아마 말하는 내용을 봐서는 방금 부딪혔던 아이일 것이라 일림은 생각했다. 아이는 조금 걸음을 옮겼다. 점점 다가오는 발소리를 보아 제게 다가오는 듯 했다.

“자기 몸도 못가누다니.”

그렇게 내뱉고서는 아이는 일림의 어깨를 잡고 끌어 당기듯 상체를 일으켰다.

“정말 누가 누구를 넘어지게 한건지…”

아이는 짜증난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일림은 그 모습이 꽤나 귀엽다 생각되어 살짝 정말 아주 살짝 웃음을 지었다.

“…”

아이는 일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도 잘 오지 않는 복도에는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홍력. 너는?”

아이가 조심스레 말을 내뱉었다. 갑자기 제 이름을 말하는 모습에 조금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이내 일림은 이것도 제 삶에서 그다지 겪어보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조금 기뻤다.

“일림. 허일림.”

제 이름을 말하고서, 일림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아이는 저멀리로 뛰어가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텅 빈 복도에 일림을 혼자 두고 떠나버린 아이는 다음날 일림의 병실에 찾아왔다.

“너는 그… 어제…”

일림은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일림의 말이 제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는지, 아이의 미간은 깊게 골을 만들며 찌푸려졌다.

“홍력. 이름 어제 말했었잖아.”
“아…”

일림은 그제서야 어제 아이가 말했던 이름을 기억해내었다. 잊을게 따로 있지.

“자기 몸도 못가누니까 계속 침대에 누워 있는거야?”

어느샌가 침대로 다가와 옆에 걸터 앉은 홍력은 일림에게 물었다. 아이의 순수한 호기심이라는 건 어쩌면 너무나도 잔인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지. 밖에 나가서 어제같은 일이라도 생기면 너무 곤란해지니까.”
“흐음… 심심하지는 않아?”
“이미 익숙하니까. 너는 밖에서 같이 안놀아?”

일림의 물음에 홍력은 제 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저런 애들 너무 유치하니까.”

푸흐흐 일림은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 너무나도 아이같은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도 매일 홍력은 일림의 병실로 찾아왔다. 떄로는 책을, 때로는 먹을 것을 그리고 다른 날은 빈손으로 병실을 찾아왔다. 무엇이 재미있어서 제 병실에 찾아오는지 일림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홍력이 병실에 찾아오는걸 좋아하는 듯이 보였으니 그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작은 어린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일림으로서도 홍력과 지내는 것이 꽤 즐거웠다.

그 작은 행복은 금이 안 갈 수는 없는 존재였다. 어느 때와 같이 홍력은 일림의 병실을 찾아갔다. 그 때까지는 그 무엇도 변한 것이 없었다. 똑같은 길 똑같은 문, 그리고 문에 적힌 이름 모두. 달라진 것은 그 안에 언제나 저를 맞이해주던 일림이 없다는 점이었다.

무언가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홍력은 바닥으로 떨어진 귤이 제 발에 밟혀 짓물려 터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병원 복도를 달렸다. 어린아이의 짧은 다리로는 한참을 뛰어야 간호사들이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허일림… 허일림 어디있어!”

병원 안을 온통 울릴정도로 커다랗게 홍력은 외쳤다.
설마. 설마. 설마.
그 사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무리는 아니었다. 며칠동안 계속 곁에 있으면서 놀란 적이 없던 날은 없었다.
때로는 픽 쓰러져 잠들기도, 때로는 숨을 쉬기 힘들어 옆에 있던 마스크를 씌워줘야했던 날도 있었다.
사람의 목숨은 너무나도 연약해.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예전에 보았던 문구가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저 밖에 뛰노는 애들은 전혀 아닌데. 왜 허일림 너는 마치 손을 대면 부서질 것 같은 유리인형같은거야.

“허일림 환자는 지금 수술중이라서…”

간호사가 허겁지겁 무언가를 뒤지다가 찾았는지 홍력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홍력은 사지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 했다. 아직 죽은 것은 아니구나. 안도감이 마음에 퍼졌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분노 또한 자리잡았다. 왜 말해주지 않았지?
그리고 홍력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일림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제 부모도 그랬다.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로 족할뿐, 그 이상 그 이하의 존재도 아니었다.

수술후 사흘이 지났다.
일림의 병실에는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빈자리는 누구라도 크게 느낀다. 특히 제 인생에서 그리 자리가 찬 적이 없었던 일림은 그 공백이 너무나도 크게만 느껴졌다.

“왜 안오는 거야…”

원망을 담은 말은 병실의 문턱도 넘지 못하였다.

“그때는 상태가 그나마 좋았지만 지금은 수술한지도 별로 안되어서 안된다니까요!”
“하지만…병원 밖으로 안나가고 병원 안에서 돌아다닐테니까 어떻게 안 될까요?”

이미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일림은 제 고집을 꺾지 않았다. 홍력을 만난 날 처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일림의 의지는 확고했다.

“안돼요. 이번에 쓰러지면 저희가 발견하기 전에 무슨 일이 날지도 모른다구요!”
“…..”

수번의 거절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되는 제 몸상태는 그 누구보다 사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은 사실이 될 것이었다.
일림이 더이상 말을 잇지 않자 간호사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은 듯 일림의 병실을 나섰다.

힉힉. 힘들게 숨쉬는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설마. 홍력은 말도 안되지만, 그래도 제 바람을 담아 희망을 품었다. 쪼르르르 짧은 다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문을 열자 보인 것은 일림이었다.

“일림..!”

하지만 그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 바닥에 쓰러져 얕은 숨을 들이쉬고 뱉고를 빠르게 반복했다. 홍력은 빨리 널스 콜을 누르기 위해 움직이려 했으나, 이내 일림의 미약한 손에 멈춰서게 되었다.

“화가 나도… 내가 보기싫어도… 마지막에 말을 해줘. 나는… 오고싶어도…못.. 가니까.”

겨우겨우 억지로 말을 내뱉은 일림은 그대로 축 늘어져 쓰러졌다.

눈을 떴을떄에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홍력일까. 과연 제가 정말 찾아갔는지조차 애매했다. 기억일수도, 아니면 꿈속에서 끊겨진 기억에 덧붙여 이은 환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눈을 뜨는 순간 일림은 그것이 기억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예쁜 얼굴이… 엉망이네?”

일림은 힘들게 웃음을 지었다. 근육이 제 말을 듣지 않아 과연 입꼬리가 제대로 올라갔을지, 떨리지는 않았을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게 홍력은 일림의 품 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수술 왜 안 말해 줬어?”

아… 일림은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이미 날짜 감각이 너무 무뎌져 얼마가 지났는지 셀 수가 없어 기다리고만 있었던지라 미리 귀뜀을 못해줬었다.

“그건.. 수술날이 언제인줄 몰라서… 이젠 며칠이 지났는지 잘 모르겠거든.”
“난,…엄마 아빠처럼… 내가 필요없는줄 알고…”

엉엉 소리내어 우는 홍력을 일림은 그저 쓰다듬어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바로 할 정도라면 얼마나 속에 쌓아놓았던 걸까.

“앞으로 의사선생님한테 수술 하루 전에는 말해달라해서 너에게 알려줄게.”
“꼭이야?”
“응 약속할게.”

결국 심장의 차례가 오고야 말았다. 일림은 이제 이것마저 제 것이 아니게 된다면 과연 자신은 사람일까 아니면 인간의 탈을 쓴 로봇이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심장. 어찌보면 인류역사상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부위였다. 생명의 원천, 그리고 과학이 아직 발달치 못했던 때에는 이곳이 감정의 중심지였고, 핵심이었다.

“하지마.”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홍력의 뺨은 눈물범벅이 된 후였다. 외로운 아이. 이 가엾은 아이를 어떻게 놔두고 세상을 떠야하나. 일림은 처음으로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저 멀리의 신을 원망했다. 자신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세상에 혼자 남겨질 아이가 너무나도 불쌍했다.

“하지 않아도, 더이상 버틸 수는 없는걸… 다시 너를 만나기 위해서 힘낼테니까.”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 남은 기술의 완성을 위해 차가운 얼음 속에서 세월을 건너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공백의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조금 더하면 완성이라 의사는 자신했지만, 모든 연구가 그렇듯 후에 마지막에 와서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음을 알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할지도 몰랐다. 그러게 된다면 눈앞의 이 아이는 시간의 공백은 물론,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의사가 그랬어. 수술 받지 않아도, 냉동상태에 들어가서 미래를 기다리면 된다고…!”

홍력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일림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의사가 이런말을 아이에게 한 걸까. 그리고 이 아이는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몇 년 아니 몇십 년 동안 그대로 잠들어 있어도 되니까. 떠나지는 마. 기다릴테니까. 반드시 그동안 멋진 어른이 되어있을테니까.”

결국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일림은 그 눈물 방울 방울을 그저 손으로 닦아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응? 잠들어있는 모습이라도, 살아있는게 좋아.”

그 처절한 애원을 일림은 제가 옳다고 여기며, 무시할 수는 없었다.

수면 모드 해제

넓지만 단 하나의 관을 담고 있는 방에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싸늘한 시체처럼 창백하던 얼굴은,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빠르게 그 열기를 되찾았다. 홍력은 아직까지 차가운 손을 감싸 잡았다. 예전에 제 손을 잡아 줄 때에는 가냘프지만, 커다란 손이라 생각했건만, 이제는 너무나도 작게만 느껴졌다.

얼른 일어나 줘. 이미 수많은 시간을 홀로 기다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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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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