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학개른 배포본 전문공개

세상일은 아무리 지대한 권력자라 한들 그리 녹록하지는 않다.
마침내 대량을 무너뜨려 중원을 평정한 북연의 황제도 세상일이란 그리 쉬이 제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정복 전쟁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세상이 저의 뜻을 들어주었으나 그 외의 일에는 마치 그 모든 일들을 정복전쟁에서 모두 허비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돌 정도로 그의 세상일은 그리 수월치는 못했다. 첫째로는 통일 이후 그리 국내의 정세가 안정되지 못했다는 점이요, 둘째는 그가 그토록 연모하던 이를 기어이 황후의 자리에 앉혔음에도, 황후는 그리 긴 명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연성...”
제 이름이 불린 사내는 이미 쥐고 있던 손을 조금 더 힘을 주어 쥐었다. 저를 부르는 그 음성은 곧 끊어질 듯이 가냘프게 제 귓가를 울릴 뿐이었다. 대량을 수호하던 그 우렁찬 목소리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제는 그저 병에 굴복하여 침상에서 고요히, 자세히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을 것만이 남았을 뿐이다. 울컥. 눈이 뜨거워졌다. 이 모든 것이 참혹한 전쟁을 저지른 저의 죗값인가 하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그렇다면 저를 데리고 가셔야지 왜 이 사람을 데려가십니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하늘에 한껏 원망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 앞의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것 아십니까? 이렇게 마지막까지 연성의 품에 있을 수 있다는 것에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를.”
한 없이 작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갈라지고 더욱 더 작아졌다. 결국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수많은 일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대부분은 경염에 관한 기억들이었다. 수많은 갈등과 다툼이 있었다. 때로 정말 목숨을 버릴 각오로 서로에게 굴복하지 않으려 했다. 그 무수히 많은 일들을 넘어 이제 마음이 비로소 통하였건만...
“제가 가장 후회하는 일은, 연성과 그리 수없이 많은 세월을 다툰 것이지요. 왜 이 마음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그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도 못했을까요. 그것이 가장 후회가 됩니다. 이리 짧을 줄 알았더라면...”
조금 길게 말을 한 탓일까, 경염은 끝으로 갈수록 가뿐 숨을 내뱉더니 결국 말을 마저 하지 못하고 연신 기침을 해대었다. 숨이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 연성은 그 작은 기침에도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다.
“다 알았으니, 이제 말을 삼가시오. 모두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바이오......”
떨림을 감추지 못한 채, 연성은 흐느끼듯 말했다. 그 다툼 속에서 저의 보잘것없는 자존심에 황후에게 내렸던 호된 벌들이 없었으면 이런 일도 없지 않을까, 혹은 더 뒤로 미뤄져 오래도록 제 곁에 머물러주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속죄를 하듯, 수없이 되뇌고 또 되뇌었다.
“이제 작별인사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힘겹게 들이 내쉬는 숨 사이로, 경염은 웃으며 말했다. 얼굴에 힘도, 생기도 없었지만, 진심으로 짓는 미소라는 것쯤은 쉬이 알 수 있었기에, 연성은 그 미소가 더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제 이 얼굴이, 이 표정이, 제 평생 눈 앞에 어른거릴 얼굴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어디에도 발을 붙이지 못했던 저를, 그토록 넘치게끔, 은애해주셔서,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숨을 골라가며, 경염은 연성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연성은 점점 힘이 풀려가는 손을, 마치 이 손을 꼭 붙잡고 있으면 경염이 떠나지 않을 것처럼 더욱 힘주어 쥐었다. 방울 방울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졌다. 속이 답답하고 눈가가 아플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다음에는... 다음에는 후회 없이 그대에게 내 일생을 줄 것이오. 내 모든 것을 줄 것이오. 그러니...”
목이 메이고, 전하고 싶은 말이 그에 막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경염은 천천히 다른 팔을 올려 마지막으로 연성의 뺨을 쓸었다.
“그럼...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연성의 뺨에 닿았던 손이 아래로 떨어지며, 눈꺼풀 또한 이별을 말하듯, 굳게 닫혔다.
홍력은 제 아래에 천하를 두고서도 그 깊은 마음 속에서 공허를 느낄 수 있었다. 수많은 여인들을 안아도, 몇 번이나 성대한 연회를 열어도, 그 공허의 단 한 부분조차 채울 수가 없었다. 허전하고 또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했다. 과연 도대체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홍력은 제가 공허를 느꼈던 열 다섯부터 수없이 생각했다. 무엇을 하면 이를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이를 채울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오랜 고민에도 불구하고, 홍력의 그 빈 틈은 점점 더 커져만 갈 뿐, 채워지지도 줄어들지도 않았다.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갈구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공간이 커져감과 함께 이에 대한 감정이 그리움과 비슷하다는 점과 그것이 사람을 향하고 있다는 점은 느낄 수 있었지만, 여전히 어떠한 이유로 이렇게 간절하게 그리워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공백을 자각한 지는 이미 벌써 십여 년이 지나고 있었고, 무의식적으로 홍력은 제 속의 공허는 제가 죽을 때까지 절대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고 있었다.
“밖으로 잠행을 나갈 터이니 준비하거라.”
금일의 마지막, 취침만을 남겨둔 상태에서 홍력은 충동적으로 옆의 내관에게 명했다. 공허를 자각한 이후부터 몇 번이나 이렇게 궁 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오기를 반복했던 만큼 내관의 움직임은 신속하고 또 정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복을 하고서 궁을 나설 채비를 모두 끝내자, 겨우 두 셋의 내관과 그와 비슷한 숫자의 호위들만이 황제의 뒤를 따랐다. 공허를 자각한 이후부터 시작된 잠행이었다. 아무리 궁이 넓다 한들, 제 공허를 채워줄 수 없으니 그저 겹겹이 둘러싼 담이 답답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저 밖에, 무언가 저를 부르는 듯한 이끌림이 홍력을 부르는 듯 하였다. 때때로 참을 수 없이 그리움에 사무치면 홍력은 궁 밖으로 몰래 빠져나가 이리저리 돌아다니곤 했다. 그렇게 정해진 곳 없는 발걸음이, 본능과도 같이 저가 원하고, 또 그리도 그리워하는 것을 향해 저를 이끌어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매번 제가 나오던 날들과는 달리, 오늘은 민가에서 축제가 있는 날이었다. 황궁의 것과는 달랐으니, 이것은 홍력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득시글한 인파에 한번도 어깨를 맞대며 앞으로 나아간 적 없던 홍력은 과연 저 무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나오자 마자 발길을 돌려 환궁할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사람이 많을수록 제 내관과 호위들과 떨어지기 쉬웠고, 또 혹여 제 목숨을 노리는 자가 있어 저를 미행하고 있다면 최적의 장소와, 때가 될 것이 분명하였다. 이성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위험하니 발길을 돌려 궁으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렬한 직감이 인파 속을 향하고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홍력은 그 사이를 갈등하는 동안 저도 모르게, 축제의 인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초입에 다다르는 순간, 갑자기 무언가 다른 세상에라도 온 것처럼, 공기가 달라졌다. 저 안에 있다. 저 안에서 그토록 원하던 것을 가질 수 있다. 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온 몸이 저릿하게 떨려왔고, 기대감이 온 정신을 감싸 눈 앞을 가렸다. 앞 뒤를 잴, 잠깐의 여유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눈으로 피가 쏠리는 듯이 눈가가 화끈거렸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도 낭비였다. 시야가 붉게 변했다. 뒤덮은 적색은 곧 한 자리로 모여들었다.
‘실...?”
제 눈앞을 뒤덮었던 붉음이 모이더니 이내 실의 형태가 된 것에 홍력은 의아했다. 그리고 그 실이 향하는 한 쪽 끝은 들어올린 손가락에 묶여있었다.
저 실을 따라가면 네가 원하던 걸 찾을 수 있을 거야. 얼른 걸음을 옮겨. 이번이 지나면 언제 돌아올 지 몰라.
공기가, 제 손에 묶인 실이 앞으로 펼쳐진 가느다란 궤적을 따라가라 제 귀에 속삭였다. 날아갈 듯 가벼운 목소리로, 책임을 묻자 하면 이미 날아가버렸을 목소리로. 하나 둘 셋.
마치 신호라도 되는 듯, 그 작은 목소리가 셋을 외치자마자 홍력은 걸음을 뛰듯이 재촉했다. 이번이 지나면 언제 돌아올 지 몰라. 그 말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눈으로 모였던 뜨거움은 이내, 그 손을 뻗어 홍력의 뇌 모두를 점령했다. 뜨겁고, 아프고, 그립고 또 슬펐다. 수십 개의 감정이었고, 수백 개의 감정이었고, 또 수천 개의 감정이었다. 점점 그 가짓수는 늘어나만 갈 뿐이었다. 마치 오래 전,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것을, 지금 찾으러 가는 듯 했다. 아니 홍력은 확신 할 수 있었다. 지금 제가 달려가는 것은 까마득한 옛날 제가 떼어낸, 떼어내진 저의 일부이고, 또 전부이라는 것을.
수명의 장정들이 모여있어도, 까딱하면 발에 채일 듯한 아이들이 저의 앞에 있어도, 그 어느 때보다 그것들을 어떻게 지나가야 할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지나온 길의 거리만큼의 실이 손가락을 감아왔고, 이내 손 전체를 감아오기 시작했다. 곧 끝이 난다. 그 끝이 어디를 향하는지 모르고 길이도 얼마나 긴지 알지 못했지만, 끝이 곧 온다는 것은 직감할 수 있었다. 주체할 수 없이 뛰는 심장과, 화끈거려 이제 눈물이 뺨을 타고 내리는 눈,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머리가 그 증거였다. 마지막으로 제 눈 앞을 가리고 있던 사내를 지나자, 눈 앞은 빛으로 점멸했다.
한미한 가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세도가의 자제도 아니었기에 일림은 그다지 입신양명의 꿈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언젠가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아,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고, 그렇게 늙어서 죽지 않을까. 그의 미래에 대한 계획은 고작 이 정도에 불과했다. 맹세코 황제의 신임을 얻고 높은 관직에 올라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그런 꿈은 꿔 본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그의 앞에 닥친 이러한 상황은 그저 당황스럽고, 또 기회라는 생각보다는 혹여 잘못을 하여 목이 달아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부터 들 뿐이었다.
“고개를 들라.”
전혀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푹 숙인 일림에게 황명이 떨어졌다. 일림은 조심스레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방금 귓가를 울린 황제의 목소리가 무게가 실려 제 목을 짓누르는 듯 했다. 하나 둘, 하나 둘.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는 중압감에 일림은 새파랗게 질려 대부분의 신경을 호흡을 가다듬는 데에 쏟았다. 이러면 조금 편안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오히려 긴장감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었다.
“그대는 과인을 본 적이 있는가?”
또다시, 황제의 말이 일림에게로 떨어졌다. 모으고 있는 두 손이 형편없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마 천 너머로도 그 떨림을 볼 수 있으리라. 이렇게 황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처음으로 발걸음한 일림으로서는 그 물음의 의도를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완전히 올라간 고개에 일림은 질끈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눈앞에 보이는 얼굴은...
“......!”
방금 전 까지 생각했던, 황제의 옥면을 제까짓게 어찌 알겠냐 했던 생각은 이미 저 멀리로 날아갔다. 마치 단단한 쇠몽둥이로 뒷목을 후려 맞은듯한 충격이 일림을 감쌌다. 분명 축제에서 만난 그 이였다.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 그리 말하던 것이 이런 것이었나. 그 이후로 제가 가르쳐준 저의 집 근처에 전혀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던 사내를 원망했었는데, 하마터면 경을 칠만한 일을 저지를 뻔 한 것이었다.
“내 장담하지 않았느냐.”
조금의 웃음을 띤 목소리가 편전을 울렸다. 오랜만에 듣는 이 목소리를 방금 전 황제의 목소리로 알 적에는, 어째서 알아채지 못했을까.
“그래서 그때의 제안은 생각해보았느냐?”
“소인, 황제의 명을 받잡나이다.”
2017.01.07
카이학개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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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r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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